

Editor's Note
- ADHD 내담자의 지각과 과제 미수행을 단순한 태도나 저항이 아닌 '실행 기능'의 결함과 '시간 맹'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 전통적인 통찰 중심 상담에서 벗어나 시간의 시각화 및 과제 외부화 등 ADHD 내담자에게 특화된 구체적인 코칭적 개입 전략을 제시합니다.
- 과제 문턱을 낮추는 살라미 기법과 실행 의도 설정, 그리고 상담 효율을 높이는 AI 기술 활용 등 내담자의 효능감을 높이는 실질적 방안을 제안합니다.
"오늘도 늦으셨네요?" 성인 ADHD 내담자의 시간 약속과 과제 수행,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요?
상담실 문을 열고 헐레벌떡 들어오는 내담자, 시계는 이미 약속 시간에서 15분이 지나 있습니다. "죄송해요, 선생님. 나오려는데 갑자기 지갑이 안 보여서..." 혹은 "과제 해오기로 한 걸 깜빡했어요."라는 말을 들을 때, 상담사로서 우리는 복잡한 감정을 느낍니다. 처음에는 이해하고 수용하려 하지만, 이러한 패턴이 반복되면 상담사의 역전이(Countertransference)가 자극되기도 합니다. '내 상담이 중요하지 않은 걸까?', '저항(Resistance)의 표현인가?'라는 의문이 들며 치료적 동맹이 흔들릴 위기에 처하기도 하죠.
하지만 성인 ADHD(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 내담자에게 이러한 행동은 의도적인 무시나 저항이라기보다, **신경발달학적 결함인 '실행 기능(Executive Function)'의 오작동**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특히 **'시간 맹(Time Blindness)'**이라 불리는 시간 감각의 왜곡은 이들이 겪는 가장 큰 고통 중 하나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ADHD 내담자의 반복되는 지각과 과제 미수행 문제를 임상 심리학적 관점에서 분석하고, 상담 장면에서 즉시 적용할 수 있는 구체적인 개입 전략을 나누고자 합니다. 상담사의 좌절감을 줄이고, 내담자의 효능감을 높이는 실질적인 방법을 함께 고민해 봅시다.
1. '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보이지 않아서'입니다: 실행 기능과 시간 맹
성인 ADHD 내담자를 돕기 위한 첫 단계는 그들의 행동을 '태도'의 문제가 아닌 '능력'의 문제로 재정의하는 것입니다. Russell Barkley 박사를 비롯한 ADHD 전문가들은 이를 실행 기능의 장애로 설명합니다. 실행 기능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행동을 계획하고, 조절하고, 유지하는 뇌의 CEO 역할을 합니다. ADHD 내담자의 경우, 이 CEO가 자주 휴가를 떠나는 것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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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맹(Time Blindness)의 이해
ADHD 내담자에게 시간은 흐르는 연속체가 아니라 '지금(Now)'과 '지금 아닌(Not Now)' 두 가지로만 존재합니다. 미래의 약속(상담 시간)은 '지금 아닌' 영역에 있다가, 임박한 순간 갑자기 '지금'으로 들이닥칩니다. 이는 전두엽의 성숙 지연과 관련이 깊으며, 시간의 흐름을 피부로 느끼지 못하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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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 기억(Working Memory)의 누수
상담 회기 중에 "다음 주까지 감정 일기를 써보세요"라고 약속했을 때, 내담자는 진심으로 동의합니다. 하지만 문을 나서는 순간, 새로운 자극이 들어오면 작업 기억 속의 '과제' 정보는 휘발됩니다. 이는 내담자가 상담사를 존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정보를 붙잡아두는 '마음의 메모장' 용량이 작기 때문입니다.
2. 통찰 중심 접근 vs ADHD 특화 접근: 무엇이 다를까요?
많은 상담사들이 내담자의 지각이나 과제 불이행을 다룰 때, 심리내적 역동을 탐색하려 합니다. "늦으신 이유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요?"라며 무의식적 저항을 다루는 것은 일반적인 신경증 내담자에게는 효과적이지만, ADHD 내담자에게는 오히려 수치심만 가중시킬 수 있습니다. ADHD 상담에서는 **'왜(Why)'보다는 '어떻게(How)'와 '언제(When)'**에 초점을 맞춘 코칭적 접근이 필수적입니다.
3. 상담실에서 바로 적용하는 구체적 개입 전략
그렇다면 상담사는 구체적으로 어떤 도구들을 제안해야 할까요? 핵심은 '시간과 과제를 외부화(Externalizing)'하는 것입니다. 머릿속에 있는 정보를 눈에 보이는 물리적 세계로 끄집어내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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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시각화: 아날로그의 귀환
디지털 시계는 숫자만 보여주지만, 아날로그 시계는 '지나온 시간'과 '남은 시간'의 양(Volume)을 보여줍니다. 내담자에게 타임 타이머(Time Timer)와 같은 시각적 도구 사용을 권장하세요. 또한, 상담 시작 전 "오늘 우리가 50분을 어떻게 쓸지 파이 차트처럼 그려볼까요?"라고 제안하며 시간 구조화 연습을 시키는 것도 훌륭한 개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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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제 수행의 마찰력 줄이기: '살라미 기법'
"일주일 동안 운동하기"는 ADHD 뇌에게 너무 거대하고 추상적인 덩어리입니다. 이를 얇은 살라미 소시지처럼 아주 얇게 썰어줘야 합니다.
- ❌ 나쁜 예: "이번 주에 헬스장 가세요."
- ✅ 좋은 예: "화요일 저녁 7시에 운동화 끈만 묶으세요. 그 다음은 안 해도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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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행 의도(Implementation Intentions) 설정하기
상담 말미에 단순히 "노력해볼게요"로 끝내지 마세요. "만약(If) ~하면, 그때(Then) ~하겠다"는 구체적인 행동 공식을 만들어야 합니다. "만약 저녁 먹고 식탁에서 일어나는 순간(단서), 바로 싱크대에 그릇을 넣겠다(행동)." 이처럼 특정 상황을 행동의 방아쇠(Trigger)로 설정해두면 의지력 소모 없이 자동적인 행동을 유도할 수 있습니다.
결론: 내담자의 '외부 전두엽'이 되어주는 상담, 그리고 기술의 활용
성인 ADHD 내담자와의 상담은 때로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상담사가 그들의 신경학적 특성을 이해하고, 비난 대신 구체적인 '전략'이라는 비계(Scaffolding)를 제공할 때, 내담자는 비로소 자신의 삶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우리의 목표는 내담자의 결함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그 결함을 보완할 수 있는 안경을 맞춰주는 것입니다. 작은 성공 경험들이 쌓여 내담자가 "나도 할 수 있구나"라는 자기 효능감을 회복하는 과정은 그 어떤 치료보다 강력합니다.
이 과정에서 상담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기술적 도구의 활용도 적극 고려해볼 만합니다. ADHD 내담자들은 상담 중에 자신이 뱉은 말이나 약속을 금방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때 상담사가 모든 세부 사항을 기억하고 기록하는 것은 큰 부담이 됩니다.
최근 등장한 AI 기반 상담 축어록 및 분석 서비스는 이러한 어려움을 해결하는 좋은 파트너가 될 수 있습니다. 상담 중 내담자가 스쳐 지나가듯 말한 "아, 맞다. 화요일엔 항상 바빠요"와 같은 시간 관리의 단서나, "알람을 맞춰도 못 들어요" 같은 구체적인 난관들을 AI가 정확히 기록하고 요약해 줍니다. 상담사는 기록의 부담을 덜고 온전히 내담자의 눈빛과 비언어적 행동에 집중할 수 있으며, 다음 회기에 AI가 요약해 준 '지난 회기 핵심 과제'를 내담자와 함께 화면으로 확인하며 기억을 되살려줄 수 있습니다. 이는 내담자에게도 객관적인 피드백을 제공하여 치료 동맹을 강화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이번 주에는 내담자와 함께 작은 '시각적 타이머' 하나를 설정해보는 것부터 시작해보면 어떨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