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Editor's Note
- 심리검사 결과를 부정하는 내담자의 방어 기제를 임상적 데이터로 활용하는 분석적 관점 제시
- MMPI-2 타당도 척도를 기반으로 한 재실시 결정의 객관적 기준과 유형별 심리 특징 안내
- 치료적 평가(TA) 모델을 적용하여 내담자의 저항을 낮추고 재실시를 이끄는 공감적 설득 전략 제안
상담실 문을 열고 들어온 내담자가 심리검사 결과지를 받아들고는 미간을 찌푸립니다. "선생님, 이 결과는 좀 이상한데요? 저는 이렇게 예민한 사람이 아니에요." 혹은 "제가 우울하다고 나왔는데, 저는 그냥 조금 피곤할 뿐이라니까요?"라는 반응을 보일 때, 상담사로서 당혹스러움을 느낀 경험이 한 번쯤 있으실 겁니다. 열심히 라포(Rapport)를 형성하고 진행한 검사인데, 결과 자체를 부정당하면 마치 상담 관계가 흔들리는 듯한 위기감을 느끼기도 하죠.
하지만 잠깐 멈춰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담자의 '부정'과 '방어'는 상담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아니라, 그 자체로 매우 중요한 '임상적 데이터'입니다. 내담자가 왜 검사 결과를 낯설어하거나 거부하는지, 그 이면에 숨겨진 심리적 기제는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이야말로 정확한 사례 개념화(Case Conceptualization)의 시작점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블로그에서는 MMPI-2, TCI 등 주요 심리검사에서 방어적인 태도를 보이는 내담자의 심리를 분석하고, 재실시를 결정하는 명확한 기준과 내담자를 설득하는 세련된 기법에 대해 깊이 있게 다뤄보겠습니다.
1. "왜 내담자는 검사 결과를 부정할까?" 방어 기제의 심층 분석 🔍
내담자가 검사 결과를 "이상하다"라고 말할 때, 이는 단순한 불만이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임상적으로 이는 크게 두 가지 흐름으로 나뉩니다. 하나는 의도적으로 자신을 좋게 보이려 하거나(Faking Good) 반대로 나쁘게 보이려 하는(Faking Bad) 의식적 왜곡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에 대한 통찰 부족으로 인해 실제 모습과 자기 지각 사이에 괴리가 발생하는 무의식적 방어입니다.
상담사는 내담자의 반응이 어느 유형에 속하는지 파악하기 위해 타당도 척도(Validity Scales)와 임상 척도를 교차 분석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MMPI-2에서 L척도와 K척도가 과도하게 상승하고 임상 척도들이 전반적으로 하강해 있다면, 내담자는 '심리적 고통이 없는 건강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 하는 욕구가 강한 상태입니다. 반면, 모든 척도가 상승했다면 '도움을 요청하는 절박한 신호(Cry for help)'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미묘한 차이를 구분하는 것이 재실시 여부를 결정하는 첫걸음입니다. 아래 표를 통해 방어 유형에 따른 내담자의 심리적 특징을 비교해 보겠습니다.
2. 재실시 결정 기준과 치료적 평가(Therapeutic Assessment)를 활용한 설득 전략 💡
그렇다면 언제 재실시를 권유해야 할까요? 단순히 결과가 타당하지 않다고 해서 무조건 다시 검사를 요구하는 것은 상담 관계를 해칠 수 있습니다. 재실시는 '오류 수정'의 과정이 아니라, 내담자가 자기 자신을 더 솔직하게 마주하도록 돕는 '치료적 개입'의 과정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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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실시가 필수적인 임상적 기준 (Red Flags)
우선 기술적으로 해석이 불가능한 경우입니다. MMPI-2 기준으로 VRIN(무선반응)이나 TRIN(고정반응) 척도가 T점수 80점 이상일 경우, 내담자가 문항을 제대로 읽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아 결과 해석이 무의미합니다. 또한, F척도가 100 이상이거나 L, K 척도가 극단적으로 상승하여 임상 척도의 프로파일이 완전히 억제된 경우(Submerged Profile)에는 실제 병리를 파악하기 어려우므로 재실시나 보충 검사가 필요합니다. 단, 급성 정신증이나 심각한 위기 개입이 필요한 상황인지 감별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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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거짓말을 해서 다시 해야 해요"가 아닌, 공감적 설득법
내담자에게 재실시를 권유할 때는 비난이나 추궁의 뉘앙스를 철저히 배제해야 합니다. 스티븐 핀(Stephen Finn)의 치료적 평가(Therapeutic Assessment) 모델을 적용하여 다음과 같이 접근해보세요.
- 타당화(Validation): "검사 결과가 OO님이 생각하는 본인의 모습과 다르다고 느끼셨군요. 충분히 그렇게 느끼실 수 있습니다."
- 의도 읽어주기(Reframing): "아마도 OO님께서 검사를 하실 때, 낯선 환경이라 조금 더 잘 적응하고 괜찮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으셨던 마음이 반영된 것 같아요. 혹은 너무 힘드셔서 이 고통을 누군가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이 컸을 수도 있고요."
- 협력적 제안(Collaborative Invitation): "이 결과는 OO님의 '방어적인 마음'을 보여주는 사진과 같아요. 이번에는 우리가 좀 더 안전한 관계가 되었으니, 마음의 빗장을 조금만 풀고 편안하게 다시 체크해 본다면, OO님의 진짜 고통과 강점을 더 잘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같이 다시 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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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적 검사 및 면담 병행 전략
만약 내담자가 자기보고식 검사(Self-report)에 대해 지속적으로 거부감을 보인다면, 억지로 재실시를 강요하기보다 투사 검사(Rorschach, SCT)를 보완적으로 실시하여 의식적인 방어를 우회하는 전략을 사용해야 합니다. 또한, 구조화된 면담을 통해 검사 결과와 실제 생활 기능 간의 불일치를 탐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결론: 방어는 내담자가 입은 '갑옷'입니다 🛡️
"검사 결과가 이상해요"라는 내담자의 말은 상담사를 향한 공격이 아니라, 자신의 취약함을 들키고 싶지 않은 자기 보호의 신호일 수 있습니다. 상담사가 이 신호를 예민하게 포착하고, 안전한 환경에서 다시 자신을 드러낼 수 있도록 돕는다면, 재실시 과정은 단순한 행정 절차가 아니라 치료의 핵심적인 터닝 포인트가 될 것입니다. 내담자의 방어를 걷어내는 힘은 정교한 '채점'이 아니라, 따뜻하고 단단한 '상담 관계'에서 나옵니다.
이처럼 내담자의 미묘한 저항과 방어적인 뉘앙스를 놓치지 않으려면, 상담 장면에서의 대화 내용과 비언어적 단서를 면밀히 검토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50분의 상담 내용을 모두 기억하고 기록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큰 부담이 됩니다.
이때 AI 상담 기록 및 축어록 서비스를 활용하는 것은 매우 효과적인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상담 중 내담자가 검사 결과에 대해 보였던 구체적인 불만의 표현, 망설임, 목소리의 톤 변화 등을 AI가 정밀하게 기록해주기 때문에, 상담사는 내담자의 방어 기제가 언제, 어떤 맥락에서 작동했는지 정확하게 복기할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다음 회기의 재실시 설득 전략을 더 구체적으로 수립하고, 내담자의 패턴을 깊이 있게 이해하는 임상적 통찰을 얻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