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Editor's Note
- HTP 검사 중 과도한 지우개 사용이 시사하는 불안과 강박의 심리학적 차이 분석
- 내담자의 동기, 행동 양상, 언어적 반응을 통한 임상적 감별 포인트 제시
- 상담 현장에서의 실전 개입 전략과 효율적인 기록을 위한 AI 기술 활용법 제안
HTP 검사에서 지우개질을 멈추지 못하는 내담자, 그 이면의 심리를 읽다
상담 현장에서 투사 검사(Projective Test), 특히 HTP(House-Tree-Person) 검사를 진행하다 보면 유독 '지우개'에 집착하는 내담자들을 만나게 됩니다. 종이가 찢어질 정도로 박박 지우거나, 선 하나를 긋고 지우기를 수십 번 반복하며 한숨을 쉬는 모습, 아마 임상 전문가라면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해보셨을 것입니다.
이때 상담사의 머릿속은 복잡해집니다. "단순히 그림 실력에 자신이 없어서 불안한 것일까? 아니면 완벽주의적인 강박 성향이 발현되는 것일까?" 내담자의 이러한 행동은 단순한 습관이 아니라, 그들의 내면세계를 보여주는 아주 중요한 '과정적 변인(Process Variable)'입니다. 그림의 결과물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바로 그리는 과정에서의 태도입니다. 하지만 막상 검사 보고서를 작성하려 하면 이 모호한 행동을 '불안'으로 기술해야 할지, '강박'으로 분류해야 할지 명확한 임상적 근거를 찾기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오늘은 HTP 검사 중 과도한 지우개 사용이 시사하는 임상적 의미를 분석하고, 이를 상담에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을 함께 고민해보고자 합니다.
불안인가, 강박인가: 지우개질의 질적 차이 분석
내담자가 지우개를 사용하는 행위는 표면적으로는 '수정'이지만, 심층적으로는 '자아 통제'의 시도입니다. 임상 심리학적 관점에서 볼 때, 불안(Anxiety)에 기인한 지우개질과 강박(Obsessiveness)에 기인한 지우개질은 그 동기와 양상에서 미묘하지만 분명한 차이를 보입니다. 이를 정확히 감별하는 것은 향후 치료 계획(Treatment Plan)을 수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불안(Anxiety) 기제: 평가에 대한 두려움
불안이 높은 내담자의 지우개질은 주로 '타인의 시선'과 관련이 있습니다. "내가 이상하게 그리면 선생님이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라는 수행 불안(Performance Anxiety)이 기저에 깔려 있습니다. 이들은 지우개질을 하면서 상담사의 눈치를 살피거나, "제가 그림을 진짜 못 그려서요"와 같은 방어적인 언어적 표현을 동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선의 질(Line quality) 역시 흐릿하거나 끊어지는 양상을 보이며, 지운 후에 다시 그린 그림이 이전 그림과 큰 차이가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더 나은 결과물을 원한다기보다, 현재의 결과물이 '안전하지 않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강박(Obsession) 기제: 내부 기준의 불일치
반면, 강박적 성향의 내담자는 타인의 평가보다는 '자신의 내부 기준'에 집중합니다. 이들은 대칭, 정확성, 디테일에 과도하게 집착합니다. 지붕의 각도가 완벽하게 대칭이 아니거나 창문의 격자가 바르지 않을 때 참지 못하고 지우개를 듭니다. 이 과정에서 내담자는 상담사를 의식하기보다 그림 그 자체와 씨름하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지우개질은 매우 힘이 들어가 있고(Vigorous), 종종 종이가 헐거나 찢어지기도 합니다. 결과물은 지나치게 정돈되어 있거나, 반대로 지우다 지쳐 미완성으로 남기도 합니다.
상담 전문가를 위한 실전 개입 전략 3가지
내담자의 지우개질을 단순히 관찰하는 것을 넘어, 이를 치료적 개입의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검사 상황에서의 대처는 라포(Rapport) 형성뿐만 아니라 초기 진단의 정확성을 높이는 데 필수적입니다.
과정 중심의 탐색 질문(Process Inquiry) 던지기
내담자가 지우개를 내려놓았을 때, 혹은 검사가 끝난 후 사후 질문(PDI) 단계에서 반드시 그 행동을 다뤄주어야 합니다.
"아까 지붕을 그릴 때 여러 번 지우고 다시 그리셨는데, 그때 마음이 어떠셨나요?"
"어떤 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수정하고 싶으셨나요?"
이러한 질문은 내담자가 자신의 불안이나 강박을 스스로 인지하게 돕는 메타 인지적 접근입니다. 내담자의 대답을 통해 우리는 앞서 표에서 분석한 불안과 강박 중 어디에 더 가까운지 명확한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평가 없음'의 구조화(Reassuring the Frame) 재확인
불안이 높은 내담자에게는 검사의 목적이 '미술 실력 평가'가 아님을 지속적으로 상기시켜야 합니다. 하지만 기계적인 "잘 그리지 않아도 됩니다"라는 말은 효과가 적습니다. 대신 "지금 그리시는 방식 그 자체가 00님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수정하지 않은 선도 저에게는 중요합니다"와 같이, '수정 행위' 자체가 상담의 재료가 됨을 부드럽게 전달하여 강박적인 수정을 줄이도록 유도할 수 있습니다.
비언어적 단서와 언어적 단서의 통합 기록
지우개질을 하는 순간의 내담자의 표정(찡그림, 안도감), 호흡(한숨, 숨죽임), 그리고 그 순간 내뱉는 혼잣말은 그림 자체보다 더 중요한 데이터입니다. 강박적인 내담자는 지우면서 분노를 표출할 수 있고, 불안한 내담자는 위축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기록해야 내담자의 방어 기제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습니다.
결론: 검사 태도는 내담자의 삶을 반영하는 거울
HTP 검사에서 지우개 가루가 쌓여가는 모습은 내담자가 일상생활에서 겪고 있는 심리적 소모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실수를 용납하지 못하는 강박, 혹은 타인의 평가가 두려워 끊임없이 자신을 검열하는 불안. 이 두 가지를 명확히 구분하고 접근할 때, 우리는 내담자가 종이 위에서 겪는 고투를 이해하고 위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상담 현장, 특히 검사 상황에서 이 모든 '과정'을 놓치지 않고 기록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내담자의 그림 그리는 손을 관찰하느라, 정작 그 순간 내담자가 중얼거린 중요한 혼잣말("아, 난 왜 이것도 못하지?")을 놓치거나 기록하지 못하는 경우가 빈번합니다. 검사 태도와 언어적 반응을 동시에 포착해야 하는 멀티태스킹의 어려움입니다.
이러한 임상적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최근 많은 상담 전문가들이 AI 기반 상담 기록 및 축어록 서비스를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있습니다. 검사 진행 중 상담사는 온전히 내담자의 비언어적 행동(지우개질의 강도, 표정 변화 등) 관찰에 집중하고, 내담자의 미세한 언어적 반응과 대화 내용은 AI가 정확하게 텍스트로 변환해주는 방식입니다.
특히 최신 AI 기술은 화자를 분리하고 맥락을 이해하여 기록하므로, 추후 슈퍼비전을 위한 축어록 작성 시간을 획기적으로 단축시켜 줍니다. 내담자가 지우개를 들며 망설이던 그 순간, 정확히 어떤 말을 했는지 다시 확인하는 것은 진단적 정확도를 높이는 핵심 열쇠가 됩니다. 이제 번거로운 타이핑에서 벗어나, 내담자의 붓터치 하나하나에 온전히 눈을 맞추는 전문가가 되어보시길 권합니다.




